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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4-27 10:51
여강길 역사속 인물들
 글쓴이 :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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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곤(李長坤)

이장곤은 자는 희강(希剛)이고, 호는 금재(琴齋)요,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갑오년(1474)에 태어나서 을묘년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임술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찬성에 이르렀다. 기묘년에 파직되어 창녕(昌寧)에서 살다가 죽었다.

○ 공은 생김새가 장대하여 어렸을 때부터 장수감이라고 일컬어졌다. 연산조 때 교리로서 거제(巨濟)에 귀양 갔는데 연산군은 항상 공에세 반정(反正)할 뜻이 있다고 의심했고 공도 또한 죄를 더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몸을 빼어 바다를 건너 함흥(咸興) 땅에 이르니, 현상 수배하여 추적이 날로 급박해지자 어찌할 길이 없어 고리 백정의 무리 속에 의탁하니, 동료들은 공이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을 비웃었다.

어떤 사람이 공의 외모를 기이하게 여겨 그 형에게 사위를 삼으라고 권하니, 일할 때에 반드시 게으른 사위라고 불렀다. 그 부인이 모든 일을 도와 수고를 나누며 또 잘 섬겨서 그 덕으로 산 것이 1년 뿐만이 아니었다.어느날 한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새 임금이 즉위하여 대사령을 내리고 옥문을 열고 모든 역사를 파하여 기뻐 환호성이 길에 이어지고 있다.” 하니, 공이 이 말을 듣고 안색이 변하여 친한 자에게 청하여 의관을 빌려 입고 그 사람과 같이 부중(府中)에 가서 반정한 사실을 확인한 후에 종이쪽지를 그 사람에게 주며 말하기를, “이제 감사의 하인을 보니 내가 어렸을 때 알던 사람이다. 이것을 전해주되 부디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말라.”고 당부했다.

조금 후에 관리들이 사방에 흩어져 이 교리인지 물었으나 못 찾고 종이쪽지를 가져 왔던 자마저 알 길이 없었다. 공이 베옷을 입고 헌 갓을 쓴 채 문 옆에 걸터 앉아, 나라고 하니 감사 이하 여러 관원이 뛰어 나와서 맞아 들이며, 손을 잡고 서로 울다가 각기 의관을 주니 차림새가 말쑥해졌다. 조정에서 특별히 교리 벼슬을 주고 지방관에게 호송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그의 명성이 온 나라에 떨쳤다. 《당적보》

○ 기묘 사화가 일어나던 날 남곤이 걸음 빠른 자를 시켜 편지를 보내 공을 불렀다. 공의 집이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었는데, 이때는 하인들도 이미 다 흩어져 가고 없었다. 급히 홍경주 등이 모인 곳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곡절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합문 밖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조광조 등을 때려 죽이려는 의논임을 알고 깜짝 놀라서 입대하여 극력 간하고 정광필을 불러서 의논할 것을 청했다. 홍경주가 임금에게 속히 결단하라고 권하자 공이 문득 그의 팔목을 잡고 말렸으니, 이날 옥사를 늦춘 것은 공의 힘이 컸다. 뒤에 마침내 남곤 등에게 배척을 받아 벼슬을 깍여 지방으로 나갔다. 공은 도량이 뛰어나고 문무의 재주를 겸비하였으므로 중종이 다시 쓸 생각으로 직첩을 주었으나 소인들이 방해하여 필경 폐고(廢錮)된 채 죽었다.

○ 공은 호기롭고 뛰어나며 맑고 깨끗하며 온갖 고생을 겪은 터이라 나아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정승이 되어 어느 직책이나 다 잘 맞았다.

○ 대간에서 공이 전날 조광조 등을 문초할 때에 의금부 당상으로서 죄인들이 그의 자를 부르는 것을 금하지 않아서 깔보였다는 이유로 파직을 청했다. 《당적보》

○ 창녕(昌寧)에 살 때에 재물이 풍족하여 거문고 등의 악기를 많이 마련해 두고 술과 고기를 갖추어 날마다 연회(宴會)와 사냥을 일삼았다. 《당적보》

○ 공이 파직된 후 여주(驪州) 강 가에 살면서 스스로 우만(祐灣)이라고 호했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강호에 사는 선비의 고상한 호칭이 아니라고 우만(雨灣)이라고 고치니, 공이 말하기를, “싸늘하고 차가워서 병골(病骨)에 맞지 않다.”고 했다. 모재가 다시 ‘우(踽)’ 자로 고치자, 공은 자기를 조롱하는 줄 알고 또 받지 않았다. 다시 ‘우(寓)’ 자로 고쳐 주니, 공은 손벽을 치며 기뻐 말하기를, “이것은 꼭 나한테 맞는다.” 하고 드디어 호를 우만(寓灣)이라고 고쳤다. 모재는 이에 우(雨), 우(踽), 우(寓) 세 글자의 뜻으로 시를 지어 희롱했다. <본집(本集)>


김안국(金安國)

김안국은 자는 국경(國卿)이며, 한훤당(寒暄堂)의 제자로서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호는 모재(慕齋), 또는 은일(恩逸)이다. 무술년(1478)에 태어나서 신유년에 진사시에는 장원하고 생원시에는 2등 하였다. 계해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정묘년에 중시(重試)에 합격했으며,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고 대제학을 지냈다.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나이 66세이고, 인종(仁宗) 묘정(廟庭)에 배향했다.

○ 공이 여주에 있을 때에 이자(李耔)는 충주(忠州)로부터 오고 이장곤은 우만(牛灣)으로부터 와서 신륵사(神勒寺)에 모여 유숙하기로 했는데, 김안로(金安老)가 듣고 말하기를, “파산(罷散) 중에 있는 중신(重臣)들이 한 곳에 모여 국가의 일을 의논하면 장차 중죄를 입을 것이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이장곤은 즉시 창녕(昌寧) 별장으로 내려가고, 이자도 또한 감히 오지 못했다. 공이 중[儈]에게 시를 지어 주기를,

동대(東臺)에서 술잔을 잡아본 지 이미 3년 / 三年廢把東臺酒
밝은 달 창강(滄江)이 괴기하게 여기겠다 / 明月滄江定怪嗔
산승에게 묻노니 그대 마저 웃지 말라 / 爲問山僧休亦笑
온갖 꽃 난만한 봄이 오면 이번 허물 보충하리 / 償愆須及百花春

하였다. 《월정만필(月汀漫筆)》

우만(寓灣) 이장곤(李長坤)

   거칠 것 없던 연산군에게도 두려운 존재가 있었다. 그가 이장곤이다. 이장곤〈李長坤 1474년(성종 5) -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희강(希剛), 호는 학고(鶴皐), 금헌(琴軒), 금재(琴齋), 우만(寓灣)이며 아버지는 한성참군(漢城參軍) 증(贈)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승언(承彦)이고 어머니는 이조참판(吏曹參判) 춘양군(春陽君) 내(倈)의 딸인 완산(完山) 이씨이다. 이장곤은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95년(연산 1)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502년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문무를 겸전했던 그는 1492년 (성종 23) 유자광(柳子光)에 의해 유장(儒將: 문반의 관원으로 무재(武才)가 있는 사람을 택하여 임명한 장수)으로 천거된 바 있다. 이장곤은 1504년 교리로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이듬해 거제도로 유배되었는데 무예와 용맹이 출중했던 그가 변을 이르킬가 두려워 한 연산군이 그를 서울로 잡아올려 처형하려하자 이를 눈치채고 함흥으로 달아났다.

이때의 일이 연산군 일기에 남아있다. [ 남해근리사(南海謹理使) 유방(柳房)이 치계하기를 ‘죄인 이장곤이 도망갔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장곤의 집을 즉시 폐쇄하고 그 부모, 동생과 족친을 수금(囚禁)하며 의금부 낭원중 순직 근신한 자를 보내어 그 형 이장길(李長吉)과 함께 조치하여 잡되 손바닥을 꿰어 수갑을 채우고 칼을 씌워 오라.’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의금부 낭원중 활을 잘쏘는 무신 2명을 보내어 잡아오라. 장곤은 활 잘쏘는 용사이니 그를 잡아 고하는 자는 익명서(匿名書)때 잡아 고한자와 같이 논상하라. 그리고 남해현감 유성(柳星)은 이 실정을 모를리 없으니 잡아다 국문하라.’ 하였다.] -연산군 12년 8월 17일
 함흥으로 도망간 이장곤은 고기잡이를 직업으로 하는 수척(水尺)의 집에 몸을 의지한다. 수척중에 양(楊)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아우가 이장곤의 비범함을 보고 그의 형으로 하여금 사위로 삼게 하였다. 그러나 장곤이 천한 일을 할 줄 모르므로 장인은 항상 게으른 사위라 부르고 같은 마을사람들도 모두 비웃었다. 다만 부인이 된 어부의 딸만이 온갖 궂은 일을 다 돕고 함께 고생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중종반정후 이장곤이 다시 벼슬길에 올랐을 때 함께 살 수 있게 됨을 물론 임금으로부터 치하를 받게 된다.

강효석(姜斅錫)이 지은 대동기문(大東奇聞)에는 이장곤이 몸을 의탁한 곳이 유기장(柳器匠: 고리버들의 가지나 대오리를 엮어 물건을 만드는 사람)의 집이었으며 그 딸을 정부인으로 삼았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채제공(蔡濟恭)이 쓴 금헌선생실기서문(琴軒先生實紀序文)과 예조참의(禮曹參議) 이상정(李象靖)이 쓴 이장곤의 행장(行狀)의 내용을 따랐다.

1508년(중종 3) 박원종(朴元宗)의 추천으로 다시 기용된 이장곤은 사헌부 장령, 동부승지, 이조참판, 대사헌,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겸 병조판서가 되었다. 병조판서시절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등에게 속아 기묘사화를 일으키는데 가담하였으나 이들의 목적이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신진사류들을 죽여 없애려는 것임을 알고는 심정등의 계획에 적극 반대하였다. 더욱이 죄인으로 몰린 사림들을 신문할 때 서로 자(字)와 명(名)을 부르며 신문하였다 하여 결국 관직을 삭탈당하고 여주에 은거하게 된다.

여강으로 물러난 이장곤은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등과 더불어 신륵사에서 술과 시로서 세월을 보내다가 조정의 정사를 비난한다는 모함을 받고 경남 창녕 옛집으로 돌아가 생을 마쳤다. 여기서 한가지 관심을 끄는 대목은 이장곤의 호가 ‘우만(寓灣)’이었다는 점이다.

여주문화원이 1996년에 발간한 ‘여주고을 땅 이름의 유래’에 보면 여주읍 우만리(又晩里)는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물이 고여 소(沼)가 졌으므로 소만이 또는 우만, 우만이, 우강이라 하였는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변경조치에 따라 우만리라 하였다 한다. 또 조선시대 판서와 찬성을 지낸 이장곤이 이곳에 머물러 살면서 동네 이름을 따서 호를 우만(又晩)이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간추리면 이장곤은 우만리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그의 호에서 보듯 동네이름이 원래 우만(寓灣: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참조) 이었느나 변천과정에서 우만(又晩)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 1512년(중종 7년 7월 13일)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2천여명의 야인이 쳐들어오자 정병 3백여명을 이끌고 한사람의 전사자없이 적을 섬멸했던 용병의 달인 이장곤이 5백여년전 이땅에서 살다갔다.


   민진원(閔鎭遠)
  노론의 도움을 얻어 임금자리에 오른 영조에게 있어서 탕평책의 수행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영조임금은 자신의 지지세력인 노론에게 기득권을 포기하라고 종용하는 한편 자신을 역적으로 몰았던 소론을 용서하고 등용해야하는 이율배반적 위치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주사람들이 영조의 탕평책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을 강하게 거부한 여주사람도 있었다. 그가 민진원이다. 민진원(閔鎭遠 1664 - 1736)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 세심(洗心). 아버지는 여양부원군 유중(維重)이며 어머니는 좌찬성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민진원은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오빠이기도 하다. 송시열의 문인으로 1691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당시는 인현왕후가 유폐되고 노론이 탄압을 받던 때라 등용되지 못하다가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인현왕후가 복위된 뒤 벼슬길이 트였고 1697년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본격적인 벼슬길에 올랐다.

병조좌랑, 지평, 집의, 전라도 관찰사, 공조참의, 강화부유수를 지냈고 1712년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대사성, 이조 호조 공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중추부영사, 봉조하가 되었다. 노론의 중심인물이었던 민진원은 소론의 대표로서 백사 이항복(李恒福)의 현손인 이광좌(李光佐), 이태좌(李台佐)등과 크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들도 나름대로 공명정대한 왕도정치를 위해 탕평책을 주장하였으나 임금과는 극명한 방법의 차이를 보였다. 영조 2년 1월 1일. 민진원이 “옳은 것을 상주지 않고 그른 것을 죄주지 않으며 너그럽지 않을 데에 너그럽고 준엄할 데에 준엄하지 않으므로서 탕평은 커녕 난망(亂亡)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라며 임금을 꼬집었다.

영조 9년 2월 3일 이광좌가 아뢰기를 “ ‘처지를 바꾸면 같다.’고 하셨는데 대개 사람은 각각 같지가 않은데 어찌하여 처지가 바뀐다고 해서 같아지겠습니까? 신이 죄가 있다면 죄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청컨대 큰 벌을 내려 나라의 체통을 높이게 하소서.”하면서 줄건 주고 받을 건 받겠다는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바꾸면임금이 오른손으로는 이광좌의 손을 잡고 왼손으로는 민진원의 손을 잡고서 회유하였으나 이들은 듣지 않았다. 영조 11년 7월 15일 마침내 이들 사이는 함께 대궐에 입시하는 것조차 꺼려할 정도로 멀어졌다.
 
영조 12년 3월 19일 임금이 이번에는 민진원과 이태좌를 화해시키기 위해 이들을 희정당(熙政堂)으로 불러 술자리를 벌였다. 민진원의 아들 민형수(閔亨洙)와 이태좌의 아들 이종성(李宗城)도 함께 불렀다. 임금이 명하여 술잔을 가져다가 마주대하여 마시면서 유감을 풀도록하고 이르기를 “어찌하여 서로 다투느냐? 하자 이종성이 취하여 아뢰기를 ‘민형수의 아비가 신의 아비와 함께 기로소에 들어갔으니 신의 아비는 바로 그의 아비와 같습니다.

그의 상소에 신의 아비를 기롱한 말이 있었는데 이는 불초(不肖)한 자식입니다.’ 하고 ‘이 당(黨)’이니 ‘저 당(黨)’이니 하면서 서로 용권(用權)하였다고 배척하면서 양보하지 않았다. 자리를 파함에 이르러 임금이 민진원과 이태좌에게 의자 앞으로 나와서 서도록 명하고 손을 잡고 위유(慰諭)하고는 문피(文皮)를 내리고는 의자에서 내려와 전송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해 11월 28일 민진원이 죽음으로서 화해의 결말은 보지 못하고 말았다. 민진원이 죽자 임금이 몹시 슬퍼하며 하유하기를 “ 민봉조하는 휴척(休戚)을 함께하는 신하로서 고집하는 것은 막힌 점이 있으나 나라를 위하는 단심(丹心)은 변함이 없었으니 내가 전후에 간격없이 대우했던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 하였다.

민진원은 여주읍 단현리에 90여칸 짜리 집을 짓고 남한강 가에 침석정(沈石亭)이라는 누각을 세워 노후를 즐겼다. 침석정이 있었던 바위에는 단암(丹巖)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그의 호는 여기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글씨를 잘 쓰고 문장에 능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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