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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4-27 10:49
난풍이 일렁이듯 봉황이 깃들인 듯, 진공대사 탑비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2,712  

『고려사』세가 태조 23년조에 “가을 7월에 왕사인 충담이 죽었다. 원주 영봉산 흥법사에 탑을 세웠는데, 왕이 친히 비문을 지었다(秋七月 王師忠湛死 樹塔于原州靈鳳山興法寺 王親製碑文)”라는 기록이 있어, 940년(태조23년)에 진공대사가 입적(入寂)하고 그 해에 탑비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은 진공대사탑비에서 건립연대 부분이 파손되어 알 수 없던 비의 건립연대를 밝혀 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이제현(李齊賢)의『역옹패설(轢翁稗說)』에는 “북원(北原) 원주 흥법사비는 고려 태조가 친히 그 글을 짓고 최광윤(崔光胤)에게 명하여 당 태종의 글자를 모아 돌에 본떠 새겼다. 말의 뜻이 웅장하고 깊으며 위대하고 고와서 검은 홀과 붉은 신을 신고 낭묘에 읍양하는 것 같고 글자는 큰 글자와 작은 글자가 서로 잘 조화되어 섞여 있어 난풍이 일렁이듯 봉황이 깃들인 듯 기운이 우주를 삼켰으니 진실로 천하의 보물이다(北原原州興法寺碑 我太祖親製其文 而崔光胤集唐太宗皇帝書 模刻于石 辭義雄深偉麗 如玄圭赤鞋 揖讓廊廟 而字大小 眞行相間 鸞漂鳳泊 氣呑象外 眞天下之寶也)”라고 하여 진공대사탑비를 극찬하고 있다.
  
또한『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권46 원주목(原州牧) 불우조(佛宇條)에 “흥법사는 건등산(建登山)에 있다. 절에 고비(古碑)가 있는데 고려 태조가 친히 글을 짓고 최광윤에게 명하여 당 태종(唐太宗)의 글씨를 모아서 모각(模刻)하였다”라 하였고, 조선 초기의 문장가인 서거정(徐巨正)의 시에 “법천사의 뜰에서는 탑을 시로 읊고, 흥법사의 대 앞에서 비석을 탁본하네(法泉庭下詩題塔 興法臺前墨打碑)”라 하였다. 이로 보아 흥법사는 신라 때부터 고려시대까지 거찰(巨刹)이었으며『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1480년(성종 11) 경까지는 절과 함께 진공대사탑비도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진공대사 탑비는 신라 말엽에 이미 당 태종의 글씨가 전래되었다는 기록을 입증해 주는 좋은 자료이다. 당 태종(627~649)의 이름은 세민(世民)으로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사숙하였으며 행서와 초서를 잘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권5 진덕왕(眞德王) 2년조에 의하면, 김춘추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당 태종이 자신이 지은『온탕비(溫湯碑)』와『진사비(晉祠碑)』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아마 이 때부터 당 태종의 글씨가 우리나라에 보급되고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비의 뒷면에는 대사가 태조에게 올린 표(表)가 해서로 새겨져 있다.

흥법사가 폐사된 시기에 대해서도 명확한 자료가 없으나, 오경석(吳慶錫)의『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에 의하면 1856년 오경석이 직접 흥법사를 탐방하였을 때 이미 흥법사는 오래 전에 폐사가 되고, 그 자리는 도천서원(陶川書院)이 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대략 임진왜란 무렵에 폐사가 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병들이 탑비를 일본으로 반출하려고 끌고 가다가 그만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며, 이후로 비신은 원주 감영에 있었다고 하며 이 무렵 절단되었다고 한다. 진공대사탑비의 비신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비신은 현재 상·하 2부 2석으로 절단되었고, 하석은 다시 3편으로 파절되어 중간 부위의 유실로 판독 불가능한 부분이 많다.           
출처: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Tip-8) 큰 절터가 강가에 운집한 까닭은
청룡사지를 비롯해 법천사지, 거돈사지, 흥법사지, 신륵사, 고달사지 등 내로라하는 큰절이 강가에 가람을 틀고 안아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좌청룡우백호 배산임수의 형국에서 부처님의 위력을 모시는 절터의 기운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득수가 되는 남한강의 큰 물줄기가 필요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마치 원자력 발전소가 어마어마한 방열을 감당하기 위해 바닷가에 세워지는 것처럼.

신라와 고려시대부터 남한강을 연해서 이름난 절집과 폐사지가 즐비한 까닭은 수로의 편리함과 뱃길을 통해 사람과 물류 및 문화가 소통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듯 하다. 특히 불교가 전성기를 누린 고려시대부터 남한강인근의 절집은 이름난 고승들이 머물며 국사나 왕사의 지위에 임해 중앙정부와 지근거리를 유지했다.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 등 뱃길을 통해 수도인 개경을 쉽게 오가면서도 세속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에 이만한 지정학적인 요지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남한강 인근의 커다란 몇몇 절들은 당시 군사주둔과 지역경제 통제의 한축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즉 왜구의 침투와 방어에 있어 절집에는 많은 중들이 상주하므로 유사시 승군으로 전환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일련의 역할에서 국사 또는 왕사가 봉직하는 사찰에 인근의 상권을 부여 또는 통제하는 인센티브가 주어졌을 수 있다.

그러나 고려이후 조선이 개국하면서 당시 고려말 불교의 혼탁을 경험한 혁명세력들은 정도전을 중심으로 불교세력을 혁파하려 하였고, 숭유억불 정책을 통치의 근간으로 삼아 불교의 혹세무민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임진왜란과 거듭되는 병자호란 등의 전란으로 절집이 불타고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Tip-9) 흥법사 전(傳)염거화상탑의 수수께끼
흥법사지 전(傳)염거화상탑(국보104호)에는 왜 전(傳)자가 붙게 되었을까. 말인즉 흥법사지에서 나온 부도탑으로 불확실하게 추정된다면 원래의 자리는 어디일까.

전흥법사염거화상탑은 통일신라 말의 고승 염거화상의 부도탑이다. 염거화상(?∼844)은 구산선문의 하나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의 개조(開祖) 도의(道義)선사의 제자로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며 선(禪)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 이후 제3조인보조체징(體澄,804∼880)에게 그 맥을 전하여 가지산문이 크게 융성하게 되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국내에 현존하는 사리탑 중에서 가장 오래된 이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부도탑은 이후 대부분의 팔각원당형 사리탑이 이 양식을 따르고 있어 그 최초의 원형이라는 의의를 지닌다. 이렇듯 연대기로 최고이자 양식으로 최초인 이 탑은 본래 흥법사터에 있었다 하나 확실한 근거가 없다.  또한 원래 위치에서 여러 차례 옮겨졌는데 1914년에 탑골공원으로 옮긴 것은 확실하며, 경복궁 뜰에 있다가 구 중앙박물관을 거쳐 현재의 중앙박물관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탑을 옮겨 세울 때 그 안에서 금동탑지(金銅塔誌)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통일신라 회창4년(문성왕 6년,844년)에 이 탑을 세웠음을 알게 되었다. 이 금동탑지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염거화상탑의 원위치 문제에 대한 재검토」와『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에 관한 조사보고서 하나』 (이순우,2002,하늘재)와 『조선고적조사약보고』(세키노다다시(關野貞),조선총독부, 1914)에 따르면 염거화상탑으로 알려진 회창묘탑과 함께 흥법사진공대사비는 모두 일본인 곤도사고로(近藤佐五郞)에 의해 반출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금의 충무로4가인 혼마치욘쵸매(本町4丁目)에 곤도골동점(近藤骨董店)을 운영한 고물상으로 우리나라의 문화재의 밀반출에 앞장선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07년 3월에는 당시 일본의 궁내대신이던 타나카미츠아키(田中光顯)가 경기도 풍덕군 서면 경천리에 있던 경천사십층석탑의 불법반출을 시도할 때에 현장에서 그 일을 직접 주도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맥락으로 보아 1911년(明治 44) 무렵에 염거화상탑이 곤도의 주도로 서울로 밀반출된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이와 비슷한 시기에 흥법사진공대사탑 또한 곤도의 소유가 되어 그의 집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이 탑은 데라우치(寺內) 총독의 소유가 되었다가 그가 이임할 때에 탑골공원으로 옮겨진 것을 1934년에 다시 총독부박물관의 뒤 경복궁으로 이전하였으나, 경복궁의 중건으로 다시 구 중앙박물관 뜰로 이전 하였다가 현재는 용산 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이렇듯 기구한 사연으로 지금까지 염거화상탑이 흥법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잘못 인식되게 되었다.

한편 국내의 문화재 약탈과 밀반출로 여론이 들끓자 조선총독부가 일부 문화재를 반환하는 과정에서 곤도사고로(近藤佐五郞)가 본래 문화재의 반출지를 허위 또는 조작 기재의 의도로 흥법사지로 적은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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