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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4-27 10:39
방랑시인 이달(李達), 손곡리에 꿈을 뭇다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4,846  

이달(李達,1539∼1612)은 조선중기의 시인(詩人)으로 본관은 홍주(洪州, 홍성), 자(字)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이다. 부정(副正) 이수함(李秀咸)과 홍주(洪州)의 관기(官妓) 사이에서 서출(庶出)로 태어나 질곡의 삶을 살았다.

이달은 비록 서얼의 신분이었지만 허봉(許篈), 양사언(楊士彦), 정철(鄭澈), 이이(李珥) 등 당대의 유수한 사대부들과 교류가 잦았다. 당시 조선조의 시풍은 주자학적 문예사조로 논리적이고 주지적인 송시풍(宋詩風)이 주류였다. 그도 처음엔 소동파(蘇東坡)에 심취했으나 사암(思菴) 박순(朴淳, 1523-1589)의 영향으로 낭만과 서정성이 짙은 당시(唐詩)에 눈을 돌리게 된다.

당시는 사화와 당쟁 그리고 임진왜란이 점철되며 정국이 매우 어지러웠던 때로, 현실에 대한 갈등이 복고적이고 온건한 것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켜 인간감정의 자연스런 발로를 노래한 당시(唐詩)로 눈을 돌리게 하였다. 기녀 홍랑의 연인으로 세간에 알려진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1539-1583), 가사문학의 효시자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1537-1582)이 이달과 더불어 그런 경향을 지닌 대표적인 시인들로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부른다. 이들은 가까이 지내며 서로 영향을 주었으며 이달은 그중 우두머리로 꼽힌다.

허균은 그의 사후「손곡산인전」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달은 얼굴이 단아하지 못한데다가 성격이 또한 호탕하여 절제하지 않았고 세속의 예법을 익히지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에게 미움을 입었다. 그는 고금의 모든 일과 자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이야기하기 즐겼으며 술을 사랑하였다. 글씨는 진체(晉體)에 능하였다. 그의 마음은 가운데가 텅 비어서 아무런 한계가 없었으며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성품 때문에 그를 사랑하기도 하였다. 그는 평생토록 몸 붙일 곳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사방에 비렁뱅이 노릇을 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천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가난과 곤액 속에서 늙었으니, 이는 참으로 그의 시(詩)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그의 몸은 곤궁했지만 그의 시는 썩지 않을 것이다. 어찌 한때의 부귀로써 그 이름을 바꿀 수 있으리오.
                     ―허경진 역 『손곡 이달의 시선』(평민사,2001) p.122

흔히 그를 김삿갓(金炳淵,1807~1863)과 비교하곤 한다. 남다른 두뇌와 시재(詩才)를 지닌 그가 울분을 달랠 수 있는 길은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뿐이었다. 김삿갓은 죄인의 자손이라는 죄책감과 할아버지를 비난했다는 부끄러움 때문이었지만, 이달은 서얼 출신이라는 제도의 얽매임 때문에 방황의 길을 걸었다.
이달은 떠돌이 생활로 울분을 달래고 시를 지어 세속사를 잊고자 했다. 잠시 원주시 부론면 손곡에 들어와 한때를 살았으므로 호를 손곡이라고 하였다.

그의 시는 신분제한에서 생기는 한(恨)과 애상(哀想)을 기본정조로 하면서도 따뜻하게 무르녹았다. 근체시(近體詩) 가운데에서도 절구(絶句)가 뛰어나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조선시대의 오언절구(五言絶句) 가운데 대표작으로 그가 지은 '별이예장(別李禮長)'을 꼽았다.

1725년 정진교(鄭震僑)의 상소(上疏)에서는 성종(成宗) 이후의 서얼(庶孼) 가운데 걸출한 인물로 박지화(朴枝華), 어숙권(魚叔權), 조신(曹伸), 이달(李達) 등이 거론되었다. 그는 신분 때문에 관직에 나아가 자신의 포부를 마음껏 펼치지는 못하였으나, 신분에 제약을 받지 않는 시의 세계에서만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묘소는 전해오지 않으나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군청 앞과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에 시비(詩碑)가 세워져 그의 꿈이 잠들어 있으며, 손곡리의 광대패 모두골이 농협창고를 개조한 극장에서 이달의 꿈을 이어가고 있다.

시집(詩集)으로는 그의 제자 허균이 엮은 <손곡집(蓀谷集)>이 있고, 이밖에 유형(柳珩)이 엮은 <서담집(西潭集)>이 있었으나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다.

(Tip-4) 이달(李達)의 시 세계
삼당시인의 한 사람인 최경창이 전라도 무장 현감으로 있을 때 이달이 찾아가 며칠을 묵었는데 그 때 좋아지내게 된 기생이 비단 파는 것을 보고 사고 싶어 하자, ‘장사치가 강남 저자에서 비단을 파는데/ 아침 햇살이 비쳐 붉은 연기가 서렸구나/ 가인이 치마 한 벌 사달라고 졸라대지만/ 주머니를 뒤져보니 돈 한 푼이 없구려’라고 시를 써서 최경창에게 보냈다.  이에 최경창이 답하기를 ‘만약 이 시의 값을 따진다면 어찌 천금만 되겠는가? 쇠락한 이 고을에 돈이 넉넉하지 못하여 그 값을 제대로 쳐주지 못하고 1구에 백미 10석씩 계산하여 도합 40석을 보낸다.’고 하였다 한다.
-『어유야담』에 전한다.

모란봉 밑에 있는/ 선연동 골짜기에는/ 그 속에 미인들 묻혀 있어서/풀빛 언제나 봄과 같구나/ 신선의 환술을/ 빌릴 수만 있다면/ 그 옛날의 가장 아름답던 이들/ 불러일으킬 수 있으련만

평양 북쪽의 선연동(嬋娟洞)은 옛부터 기생들의 무덤이 있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사람들이 죽어서 선연동 속의 혼이 되기를 바랄 정도로 미인들의 무덤이 많았다.
어느 날 이달은 불현듯 선연동을 찾았다. 때마침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고 물기 머금은 구름은 무덤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이달은 아무 무덤에나 한잔 술을 부어 놓고 앞의 시한수를 읊었다 한다.

다음은「보리를 베는 노래 : 刈麥謠」이다.

田家少婦無夜食    농가의 젊은 아낙 저녁거리 없어
雨中刈麥林中歸    빗속에 보리베어 숲을 지나 돌아오네.
生薪帶濕烟不起    생 섶은 습기 띠어 불이 일지 않고
入門兒女啼牽衣    문에 들어서니 어린 딸이 옷자락 끌며 보채네.

허균은 이 시에 대하여 ‘시골집에서 먹을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그려내었다’고 평했다. 평생에 걸친 외롭고 고단한 유랑생활은 이달로 하여금 백성들의 삶의 애환을 그의 시속에 이처럼 처연하게 녹여냈다.

끝으로 김만중이 조선조 5언 절구 중 최고의 작품이라 극찬한 이달의 대표작이다.

강릉별이예장지경(江陵別李禮長之京)  강릉에서 서울 가는 이예장을 이별하다

桐花夜煙落(동화야연락) : 밤안개 오동꽃에 깔리고
海樹春雲空(해수춘운공) : 바닷가 나무엔 봄구름 걷힌다
他日一杯酒(타일일배주) : 어느 날에야 한잔 술 나누며
相逢京洛中(상봉경락중) : 서울에서 우리 만나 볼꺼나

한시는 절구와 대구에 박히는 성운(聲韻)의 절묘함으로 그 행간에 시상을 숨긴다. 따라서 압운을 모르면 한시를 파악할 수 없다. 

밤안개 속으로 뚝뚝 떨어지는 오동 꽃잎이 이별의 눈물 같고, 바닷가 나무에는 봄 구름이 걸렸지만 왠지 가슴 한켠이 휑하다. 오동 꽃 피고 방초우거진 시절, 한 잔술로 이별을 고하며, 떠도는 몸 서울 갈 기약도 없건만 다시금 보자며 이별을 한다. 이별의 정황이 담담하면서도 사뭇 서글프다.
  
(Tip-5) 역사의 한가운데, 손곡리(蓀谷里)
손곡리는 고려의 마지막왕인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왕위를 손위하고 유폐되어 잠시 머물렀다하여 손위실(遜位室)이라 하였으며 이후 손곡리로 지명이 정착되었다. 이달과 허균 남매, 정약용, 유방선 등이 찾아들었으며, 임경업이 태어나고 이름도 벅찬 역사속의 인물들이 집산했던 역사의 복판이었다. 동악명산 치악의 정맥과 남한강의 정기는 이달과 허균의 정신을 기르더니 오늘날 박경리, 김지하, 지학순 등에게로 이어졌으며, 예부터 지금까지 이 나라를 버텨온 도도한 반골과 문재의 땅이라 할만하다.

한민족역사관 손곡리에 건립
고조선부터 고구려, 발해, 간도, 원주 등 우리나라 역사를 총망라해 보여주는 한민족역사관이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에 건립될 전망이다.
한민족역사관건립위원회(이하 건립위원회)는 70억원을 들여 부론면 손곡리에 1만6,500㎡ 규모로 한국의 역사와 시대별 유적을 보여주는 한민족역사관을 건립할 계획이라고 20일 밝혔다.
건립위원회는 1712년 조선측 대표로 중국측 대표를 만나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조선후기 정치가 원주출신 박권(1658∼1715년)을 기념하기 위해 토지소유자 박병일씨로 부터 무상기부 받아 원주에 한민족역사관을 건립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백두산정계비는 청나라와 조선의 불분명한 영토경계로 끊임없이 일어나는 국경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세운 비다.  ...(생략)                -2008. 3. 21 강원일보

삼도접경 낙후된 마을 중 하나인 손곡리에 이름도 거창한 한민족역사관이 들어 선 다는 기사다. 비록 민간에서 추진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손곡리에 대한 원주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4. 은섬포 물가에 어리는 자산 뚝바위, 흥원창
은섬포는 남한강과 섬강의 두물이 합수되는 지점으로 흥호리에 있다. 원래 조선시대 원주목 부론면 지역으로 흥원창과 시장이 있었으므로 흥원창 또는 흥원장(興原場)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검단, 신촌, 성등, 월봉, 양호, 창촌을 병합하여 흥원창과 양호의 이름을 따서 흥호리라 하였다.

은섬포는 우리나라 12조창(漕倉)중의 하나인 흥원창이 있던 곳이다. 이 흥원창은 조세미(租稅米)의 수송을 위하여 수로 연변에 설치하였던 창고로 강상 수송을 맡았던 수운창이고 이 조창제도가 완비된 것은 992년(고려 성종 11년)경이다. 흥원창은 원주, 평창, 영월, 정선, 강릉, 삼척, 울진, 평해군 등 지역의 조곡을 보관하고 수운을 통해 한양의 경창으로 운송했다.

횡성군 청일면 봉복산에서 발원한 섬강이 남한강과 만나는 은섬포는 양삿(양호) 앞강이 호수같이 넓고 깊어 흥원창 호수라는 뜻의 흥호리라 하였으며 세곡을 운송하는 평저선(平底船)을 접안하기에 좋은 곳이다. 평저선은 곡식 200석을 적재할 수 있는 배로 흥원창에 21척이나 배치되어 있었다.

세곡운송을 위해 내륙수운이 개척된 고려시대, 수도인 개성에 닿기 위해서 은섬포를 떠난 평저선은 남한강을 따라 여주와 한양을 거쳐 서해로 나간 후 예성강을 거슬러 올라가 짐을 부렸다. 물길이 육로를 압도하던 시절 남한강은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흥원창이 있던 은섬포는 물자와 사람이 들고 나던 곳으로 남한강을 매개로 역대의 수도인 개경, 개성, 한양을 강원 내륙으로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성계에 의해 부론면 손위실(손곡)로 유배를 온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황포돛배를 타고 은섬포에 내렸고, 손곡에 잠시 머물다 삼척의 궁촌리로 떠나 그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은섬포에 당도한 손님들 중에는 이달과 허균, 허난설헌과 지광국사, 양주 조안에 살고 있던 다산 정약용과 법천촌사의 맹주 태재 유방선도 있었다.

흥원포(興元浦)에 있는 옛 창고 건물은
가로지른 서까래 일자(一字)로 연했어라
봄철 조운을 이미 다 마쳤는데도
또 호탄전(護灘錢)을 강요하여 받아내누나

다산 정약용의 '강행절구(江行絶句)'에 보이는 흥원창의 모습은, 옛 창고 건물은 낡아 앙상하게 일자(ㅡ子)로 드러나 있고, 봄철에 이미 세곡운송을 마쳤건만 다시금 포구 사용료를 강제 징수한다는 것이다. 15세기에 김종직이 목도한 가흥창과 18세기에 정약용이 목도한 흥원창 민초들의 곤란한 현실이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대동강물이 마르지 않는 것이 정인들이 뿌린 이별의 눈물이 그에 더해진 까닭이라면, 조세창이 들어선 남한강 포구들의 번영의 이면에는 민중들의 땀방울과 눈물이 강물에 보태졌으며, 그래서인지 남한강은 마르지 않고 누대로 은빛 비늘을 뒤척이며 옛 일을 말해주고 있다. 어쩌면 은섬포 강물이 붉은 까닭이 민중의 피눈물을 머금어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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