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코스 5일장터길 (코스길이 1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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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장터길 이야기
5일장터는 신륵사에서 시작하여 세종대왕릉을 지나 세종대왕릉역까지 14km 구간이다. 신륵사에서 출발하여 여주대교 옆 연인교(옛 여주대교)를 건너면 1코스에 보았던 영월루가 보인다. 연인교를 지나 강을 따라 가다보면 여주시청이 나오고 시청옆에 위치한 여주초등학교가 조선시대 지방정치의 중심이라 불렀던 청심루 자리이다. 여주초등학교를 지나 대로사가 나온다. 대로사는 우암 송시열선생을 기리는 사당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 당시 철폐되지 않고 보존된 전국 47개 서원중의 하나이고, 정조대왕이 하사한 현판이 있어서 가는 이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또한 가을 철 대로사의 은행나무는 볼 만한 풍경을 자아낸다. 대로사 남쪽의 길 하나건너 상권이 여주 5일장의 중심이다. 여주 5일장은 매 5일과 10 일에 열리는데 수도권 재래시장 중에서는 성남모란장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장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길을 걷다 장날을 만나면 곳곳에 입맛을 자극하는 냄새가 자욱하다. 5일장을 빠져나와 대로사를 지나 강을 따라 가다보면 세종대교가 보이고 세종대교 아래 큰 섬인 양섬이 보인다. 양섬을 지나 세종산림욕장을 지나면 효종대왕릉이 나온다. 1년에 한시적으로 개방 되는 효종대왕릉에서 세종대왕릉을 연결하는 산길이 있는데 4월 초 진달래꽃이 만개할 때 이 길을 추천하고 싶다. 진달래꽃이 가득 피어있는 모습을 보며 두 왕릉사이를 호젓이 걷다보면 어느새 위대한 임금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세종대왕릉에서 세종대왕릉역으로가 전철을 이용할 수도 있고 다시 여주시내로 돌아올 수도 있다. 여주 관광지를 순회하는 버스가 있어서 이용에 편리하다.
재미 보태기
신륵사
신라진평왕때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나옹, 혜근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하며,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대비인 정희왕후 윤씨의 지시로 영릉 원찰로 삼아 보은사라고 불렀다.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미륵(혜근을 가리킴)이, 또는 혜근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를 막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여주시청(청심루터)
여주시청 옆으로 청심루가 있었던 여주초등학교를 지나간다. 청심루는 여주읍 창리에 있는 여주초등학교 건물 바로 뒤편에 있었던 누정으로, 여주 관아의 객사 북쪽에 있는 부속 건물이었다. 해방 전까지도 관상목)이 많이 있어 고색창연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하나 1945년 군수 관사의 화재로 인해 소실되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그 터에 1987년 경기도에서 ‘청심루터’ 표석을 세웠다. 여주는 경관이 아름다워 일찍부터 강변을 따라 여러 곳에 누정이 세워졌다. 그중에서 여주 관아의 객사였던 청심루가 가장 유명했다. 청심루에서 바라보는 신륵사의 다층전탑이 아득히 보이고 서쪽으로 영릉의 울창한 송림과 강 아래로 오고가는 돛단배들이 그림처럼 전개되는 등 ‘여주팔경’의 경관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유람을 하며 글을 남겼는데, 한때 목은 이색(1328~1396), 포은 정몽주(1337~1392)를 비롯한 약 40여 명의 시판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여주5일장
여주장이 정확히 언제부터 열렸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고려시대부터 생활필수품을 거래 하면서 자연스럽게 장이 선 것으로 추정된다. 전형적인 재래 5일장으로, 인근의 천령장(이포장)· 억억장(흥천장)과 함께 여주 지역에서 가장 먼저 생기고, 가장 번성하였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전통 5일장 형태를 갖고 서는 장중에 가장 큰 장이다. 5·10·15·25·30일에 상설시장인 제일시장 주변 일대에서 열린다. 주로 쌀·고추·마늘·참깨· 채소류·잡곡 같은 농산물이 많이 거래되고, 의류·어류·그릇·신발·잡화류등 다양한 품목이 거래된다. 여주 5일 장터를 통과하며 시골장터의 정취를 느껴보자. 장터국밥 한 그릇을 훗딱 비우고 가보는건 어떨까?
대로사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명신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정조 9년(1785) 왕이 세종대왕릉,효종대왕릉에 참배하러 왔다가 여주의 유림들과 경기 유생 정운기의 건의를 받자 김양행등 유신에게 명하여 건립하게 하고 대로사(大老祠)라 사액하였다 . 이후 대원군 이하응이 득세하자 그에게 ‘대로大老’라는 호칭을 붙이자는 움직임이 일면서 조선에 ‘대로’가 두 사람일 수 없다며 고종 10년(1873) 10월 대로사를 강한사라 개칭하였다. 이 사당은 다른 사당과는 달리 서쪽을 향하여 있고, 내부에는 송시열의 입상(立像)으로 된 초상화가 효종대왕릉이 위치한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송시열은 효종대왕이 봉림대군 시절 스승이었고, 왕이 된 뒤에는 북벌을 논의할 만큼 가장 신임하는 신하였기에 시간이 흐름에도 효종대왕의 향한 충심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양섬(羊島)
조선시대에는 나라의 필요한 소와 양,말등을 섬에 놓아 먹이고 길러 조정에 상납했다고 한다. 원래는 벌섬인데 벋섬으로 변하고 다시 버들섬으로 변하여 양섬으로 변했다고도 한다. 양섬은 천주교 신앙이 금지되었던 조선시대에 초기 여주천주교인들이 부활축하모임을 열다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순교자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또한 양섬에는 한국전쟁 전후로 희생당한 민간인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제를 연다. 생존자 증언을 통해 6.25 당시 갈대숲에서 민간인이 많이 희생된 것으로 확인된 곳이기도 하다.
효종대왕릉
효종대왕릉 영릉(寧陵)은 17대 효종(재위 1649~1659)과 부인 인선왕후 장씨(1618~1674)의 능이다. 처음엔 건원릉의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현종 14년(1673)에 여주 세종대왕릉 동쪽으로 옮겼다. 효종대왕릉은 왕과 왕비의 릉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동원상하릉으로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왕릉 중 최초의 형태이다.
세종대왕릉
세종대왕릉 영릉(英陵)은 조선 4대 세종(재위 1418~1450)과 부인 소헌왕후 심씨(1395~1446)의 릉이다. 세종은 정치·경제·사회·역사·문화 등 각 분야에서 조선시대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한 왕이다. 세종 28년(1446)에 소헌왕후가 죽자 헌릉 서쪽 산줄기에 쌍실릉을 만들었다. 동쪽 방은 왕후의 릉으로 삼고, 서쪽 방은 왕이 살아 있을 때 미리 마련한 릉으로 문종 즉위 년(1450)에 왕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분에 서로 다른 방을 갖추고 있는 합장릉이다. 세조 이후 릉 자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릉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옮기지 못하다가 예종 1년(1469)에 여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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